음악의 바깥, 바깥의 연극: 알튀세르와 브레히트
알튀세르의 서명과 자서전의 (불)가능성

 

 

▷ 칠판 앞에 앉아 있는 루이 알튀세르의 모습.

 
1) 2010년,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타계 2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다시 읽는' 심포지엄이 서울의 한 [대학교가 아닌] '유흥가' 한복판에서 열린다(그리고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참 마음에 든다). 일시는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이고, 장소는 홍대 상상마당 4층 아카데미이다. 나도 여기서 '알튀세르의 예술론'에 관한 발표를 한 꼭지 맡게 되었는데, 발표문 제목은 「미학으로 생산되지 않는 미학 ─ 알튀세르 예술론의 어떤 (불)가능성」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알튀세르 미학은 구성될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는가'라는 다소 해체적인 물음들로써 알튀세르의 '미학' 혹은 '예술론'을 (되)돌이켜보고 또한 (탈)구성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묻자면, 이러한 '해체적' 시도는 과연 가능한 걸까, 혹은 과연 성공적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또한 답하듯이 묻자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긍정의 대답은 바로 저 질문들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되어버리지는 않는가? 그리하여 다시 묻듯이 답하자면, 이것이 알튀세르의 예술론을 말하는 데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아포리아가 아닐까? 알튀세르 미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바로 이 가장 (불)가능한 쟁점들 위에 놓여 있다. 어쨌든 나는 현재 우리가 알튀세르를 '다시 읽는' 일이 바로 이러한 '해체적 공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또한 그럼으로써 비로소 바로 그 '다시 읽기'가 가능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하 알튀세르 심포지엄 <알튀세르 효과: 사망 20주년, 알튀세르를 다시 생각한다>의 포스터를 첨부해 올린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알튀세르 심포지엄을 위한 블로그가 현재 '성업(盛業)' 중이다(http://althusser.greenbee.co.kr). 현재 서관모, 서동진, 서용순, 진태원 선생 등 발표자들의 릴레이 인터뷰 연재와 함께 관련 자료들(알튀세르의 연보와 저작 목록, 발표자들의 다른 알튀세르 관련 글들 등)도 함께 선보이고 있는데, 내용은 심포지엄 당일 전까지 계속 업데이트 예정에 있다. 나는 이곳에 인터뷰와 함께 이전에 발표했던 알튀세르 관련 글 두 편(「음악의 바깥, 바깥의 연극: 알튀세르의 '유물론적' 연극론과 연극음악의 '소격효과'」, 「자서전을 위반하는 자서전: 알튀세르의 서명과 자서전의 (불)가능성」)도 다시 올려 놓았는데, 이하에서는 그중 인터뷰만을 옮겨 싣는다(인터뷰 원문: http://althusser.greenbee.co.kr/11): 

 

 

 

람혼 인터뷰: 

알튀세르, 예술과 정치의 만남

1. 알튀세르뿐만 아니라 어떤 학문적 관심사를 갖고 계신지, 현재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 기존의 이상적/역사적 '코뮤니즘(communism)'과는 다른 형태를 띤 '공동체(community)'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이론적 계보는 바타이유(Bataille), 블랑쇼(Blanchot), 낭시(Nancy), 아감벤(Agamben) 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느슨한 선'인데, 이들이 공통적으로 혹은 다각적으로 논의한 공동체(들)의 모습은 어떤 것이며 또한 그것은 어떤 미래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현재 저의 가장 큰 이론적/실천적 관심사입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어떤 '불가능성'을 자신의 존재/부재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상당히 독특하고 개별적이면서도 매우 전복적이며 집단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전체성으로 통합되지 않으면서도 개별적인 것으로 전락하지 않는 독특성(singularity)의 총체성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문제가 이러한 관심의 중핵입니다. 현재 문예계간지 『자음과모음』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고, 철학, 문학, 음악, 연극 등에 관해 다양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올해 출간을 목표로 첫 비평집과 연극음악에 대한 책을 함께 다듬고 있는 중입니다.

2.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 알튀세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또는 알튀세르를 처음 공부할 당시의 느낌 같은 것들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고등학교 1학년 때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의 첫 국역본(돌베개, 1993)을 지극히 '우발적으로' 읽게 된 일이 알튀세르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암울한 고등학교 시절, 어설픈 이해와 지난한 독해를 반복하며 읽었던 계간지 『이론』은 제게 맑스주의의 '현재'를 둘러싼 최신의 이론적 동향들을 학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습니다. 알튀세르와 관련된 책들이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때마침 출간되었던 윤소영의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문화과학사, 1995)는 저의 목마름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었습니다. 그 이후 대학에 들어와 알튀세르의 원전들과 관련 글들을 하나둘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단순히(?) 실천의 입장에서 '정치경제학적'으로가 아니라 이론의 맥락에서 '철학적'으로 읽는 방법을 제게 제시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독서의 방법'이 별로 새로울 것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알튀세르를 통해 맑스를 하나의 '철학자'로 온전히 인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3. 지금 한국에서 알튀세르 심포지엄을 연다거나, 알튀세르를 재조명하는 것의 의미, 알튀세르 사유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알튀세르의 '유산' 안에는 그의 이론적 공과(功過), 곧 그가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맑스주의 쇄신의 방향과 그가 고통스럽게 부딪쳤던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아포리아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론과 실천의 영역에서 최근 '새삼스럽게' 주목받고 있는 이른바 '정치철학의 귀환' 안에는, 그러한 알튀세르의 유산에 대한 반성과 회고, 그에 대한 희망과 절망의 흔적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점에 비춰볼 때 우리는 어쩌면 알튀세르의 이름과 그 유령(들)을 '너무도 빨리' 망각했거나 '너무도 늦게' 소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소 비약적인 비유를 하자면,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것과 비슷한 형상으로(혹은 그와 정반대로), 알튀세르 개인의 이론적 행보가 겪었던 좌절과 영광은 일정 부분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 안에서 맑스주의가 걸어온 길과 어떤 '동시성'을 공유한다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위기가! 우리는 이 전혀 새삼스러울 것 없는,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새삼스러울 정도로 유효한 이 탄식의 문장을 또 다시 발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정세적인 위치에서도 다시금 알튀세르를 요청하고 또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향후 유물론적 사유의 나아갈 길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관해 알튀세르의 이론은 여전히 많은 점들을 시사하고 있는데, 그가 말년에 정식화했던 우발성 혹은 마주침의 유물론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또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주체'란 무엇인가,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이 가능할까 등등(이 모든 질문들에는 '여전히'와 '새롭게'라는 부사어구들이 동시에 첨부되어야 합니다), 이 가장 오래된, 하지만 동시에 아직도 가장 신선한 질문들은 우리가 다시 알튀세르의 이름을 소환할 수밖에 없는 한 이유가 됩니다. 더불어 맑스 이외에 알튀세르가 주목했던 많은 정치사상가들, 곧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몽테스키외, 레닌 등에 대한 그의 글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최근 우리의 정치적 아포리아에 관해 사유할 수 있는 이론적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최근에 최장집은 한 일간지(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한국에 필요한 사상은 맑스의 것이 아니라 마키아벨리의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펼친 바 있는데, 맑스와 마키아벨리 둘 모두에 주목했던 알튀세르가 이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개인적으로 상당히 궁금합니다).

4. 우발성의 유물론, 맑스주의 철학, 국가장치 분석 등 알튀세르는 '정치'를 사유한 철학자의 이미지가 강합니다(『맑스를 위하여』에 실린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 연극에 관한 노트도 있고, 90년대 문예비평에서 알튀세르 사상이 활용된 바도 있지만 말이지요). 알튀세르 속에 '문학예술'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유의미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또 그러한 요소들이 알튀세르의 여러 작업들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 말씀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현재 한국에서 (특히 시와 관련하여) 이뤄지고 있는 예술의 어떤 '정치성'에 대한 활발한 논의들은 과거의 것과는 전혀 다른 지형과 맥락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컨대 현재의 '예술-정치'가 지닌 문제의 틀은 예술이 지닌 정치적 배경과 기원에 대한 분석(예술사회학)도 아니고 예술 안에 잠복해 있는 협의의 정치성에 대한 재발견(참여예술론)도 아닙니다. 예술을 소진하고 정치를 남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술이 정치와 어떤 방식으로 결합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현재 더욱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과 관련해 우리는 알튀세르의 연극론을 다시 참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알튀세르는 직접적으로 예술에 관해 그렇게 많은 글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특히 그의 연극론은 유물론적 연극 혹은 유물론적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여전히 많은 시사점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또한 알튀세르가 브레히트의 연극론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새로운 예술'이 아닌) '새로운 실천'의 문제의식은 레닌과 철학에 대한 그의 논의, 더 나아가 철학 그 자체의 역할과 입장에 대한 그의 일반적 논의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공명하고 있으며, 연극적으로는 '소격효과', 정신분석적으로는 '이동/전위', 정치적으로는 '자리바꿈' 등의 의미로 해석되는 'déplacement'은 특히 알튀세르의 예술론 또는 그의 사상 전반과 관련하여 새삼 깊이 천착해야 할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알튀세르가 맑스를 독해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밝혔던 '징후적 독해'는 현대 예술이 그 자신의 표현과 수용 방식에 관련하여 여전히 숙고해야 할 하나의 문제적 방법론으로 남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알튀세르를 통해 현대 예술 안에서 '당파성'에 관한 논의를 증폭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5. 다양한 활동을 하고 계신 걸로 아는데, 향후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 앞에서 밝혔듯이 첫 비평집과 함께 연극음악에 대한 책을 준비 중입니다. 그리고 제가 몸담고 있는 밴드 Renata Suicide의 정규 1집 앨범에 수록될 곡들을 녹음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껏 해왔던 대로 연극과 무용을 위한 무대음악 작곡과 연주 작업도 계속 병행해나갈 계획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알튀세르의 연극론/예술론은 제게 어떤 예술적/정치적 지침으로 작용한다기보다는 끊임없이 물음들을 생산하는 일종의 질문지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철학과 예술 사이의 접점과 긴장, 이론과 실천 사이의 왕복과 동요는 알튀세르가 여전히 제게 '새삼스럽고도 끈질기게' 제기하는 문제들이며, 아마도 이는 예술적 실천들이 지속되는 한 제게 '창조적 아포리아'들을 계속해서 제공할 것 같습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Louis Althusser, Pour Marx, Paris: Maspero, 1965.
Louis Althusser,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Paris: Stock/IMEC, 1995.

 

3) '예고편'과도 같은 가장 기본적이며 서지적인 힌트를 하나 남기자면, 알튀세르의 예술론을 가장 직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책은 크게 두 권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맑스를 위하여(Pour Marx)』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 정치 문집(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2권인데, 전자에는 알튀세르 연극론의 핵심을 [거의 유일하고도]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글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 그리고 브레히트: 한 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가 수록되어 있고 후자의 말미에서는 알튀세르가 생전에 예술에 관해 직접적으로 쓴 글들을 따로 한 장(章)으로 묶어내고 있다(그중 대표적인 글은 「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와 「크레모니니, 추상적인 것의 화가」등을 꼽을 수 있겠다). 

 

 

▷ 서재 바닥에 '차곡차곡' 널브러진(?) 알튀세르의 '시체'들.

 
4) 절판되었든 유통 중이든 여하간 기존에 번역되었던 알튀세르의 책들 외에도, 알튀세르가 발리바르(Balibar), 에스타블레(Establet), 마슈레(Macherey), 랑시에르(Rancière)와 함께 저술했던 그의 대표적인 저서 『『자본』을 읽자』, 그리고 1955년에서 1972년 사이 알튀세르의 고등사범학교 강의록인 『정치와 역사』 등이 현재 번역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그의 『철학 정치 문집』 1, 2권 전체가 가장 빨리 번역되어 소개되었으면 하는데(물론 이 중 일부의 글들은 이미 다른 책들을 통해 번역된 바 있다), 이 두 권의 책들 속에는 앞서 언급한 예술에 대한 글들 외에도 「레비-스트로스에 대하여」(1966), 「포이어바흐에 대하여」(1967), 「인간주의 논쟁」(1967), 「철학에 관한 노트」(1967-1968), 「자신의 한계 안에서의 맑스」(1978),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1982), 「유물론적 철학자의 초상」(1986) 등, 알튀세르의 사상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텍스트들이 산재해 있다. 

 

 

▷ 현재까지 Stock/IMEC에서 출판된 알튀세르의 '남겨진' 저작 여섯 권의 표지들.

 
5) 이번 원고를 준비하게 된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전 저작들을 방바닥에 늘어놓은 채 그 논의들을 전체적으로 일별하고 인용문들을 골라내는 '사치스러운'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이 여름의 열기가 최절정에 도달했던 시기에 나는 알튀세르와 '함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서 어쩌면 저간의 작업이 내게는 개인적으로 더욱 '뜨겁게' 느껴지고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밤으로는 어느덧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때가 되었지만, 나는 저 열기를 오래 간직하고 싶다.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라는, 이 역시 어느덧 진부해지고 만 한 '유명한' 결어 대신에, 시험적으로 나는 저 '미래'라는 단어를 '열기'로 한번 대체해 본다. 미래는 여전히 뜨겁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알튀세르 저서들과 연구문헌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8-17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7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0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8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